녹아내리는

2019. 8. 6. 22:18카테고리 없음

 

어둠에 적응하며 살아왔다 

작은 불빛에도 내 몸은 녹아버리니 빛을 사랑하는 것마저도 허락하지 않았고 

바라보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다 아주 미세한 빛이라면 가능하겠지만

 

 

아주 어두운 집에서 혼자 살아왔다 

몇 년을 외롭다는 생각도 없었다 

빛이 없는 곳에 익숙해진 눈과 몸은 자연스럽게 모든 공간을 외워버렸다 

 

빛이 없는 곳에 선 나 자신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그저 가만히 살아있다는 것만 느끼며

손으로 느끼는 모습을 대충 끼워 맞췄다 

내 머리카락은 매년 자라났고 

익숙하지 않은 가위질을 하기는 어려웠다 

빛이 없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기에 어쩌다가 한 번씩 온몸을 가리고 밖으로 나가는 것이 전부였다 그래 봐야 강한 햇빛에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작은 촛불 하나를 사서 돌아오는 것도 힘들었다 

조금이라도 저런 강한 빛을 받으면 녹아내리니까

나라는 게 있었다는 것도 알 수 없게 

순식간에 사라질 것이 분명했다 

 

겨우 어느 정도 크고 난 뒤야 아주 작은 빛 정도는 버틸 수 있었다 

촛불 하나쯤은 버틸 수 있게 되었다 

그래도 조금 녹아내리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장갑을 끼고 촛불을 놓고 불을 붙였다 

장갑 사이로 살짝 삐져나온 피부가 조금 녹아내렸다 

소매를 내려 피부를 감추고 두꺼운 유리로 된 등에 넣은 체 천천히 들고 움직였다 

 

어두운 방안을 돌아다니며 예전에 볼 수 없었던 것들을 모두 눈에 넣었다 

촛불은 의외로 빨리 꺼져버렸으니까 

혹시라도 약간에 바람에도 사그라지기 때문에 한번 본다면 지금 다 봐야 할 것이었다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가 빛나는 걸 발견했다 

 

촛불을 사기 위해서 나간 곳에서 봤었던 거울이라는 것이었던가 

사람에 모습을 비춰준다고 말했다 

 

커다란 검은 천을 거울 위에서 걷어내고 나를 바라봤다 

그 속에 있는 나라는 사람은 

매우 좋은 모습은 아니었다 

 

황금빛 눈동자가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빛나고 아주 짙은 머리카락이 허리 부근에서 흔들렸다 

하얀 셔츠를 입고 검은 바지를 입은 상태로 하얀 장갑으로 등 손잡이를 들고 있는 모습은 절대 이 빛과 가까워질 수 없었다 

내 모습을 보고 당황해서 잠시 손에 힘을 빼자마자 바로 등이 손에서 떨어져 내렸다 

 

쨍그랑

 

어둠에 익숙하지 않을 때처럼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불은 식어버렸고 어두워진 공간에서 멈춰있었다 

 

입술을 깨물고는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나마 유리가 가장 크고 밖에 있는 빛이 들어오는 유일한 내 방으로 올라가 침대 속에 들어갔다 

다시는 거울을 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잠에 들었다 

 

 

잘 자고 있을 무렵 커다란 소음이 들렸다 

천둥소리와 빗줄기 소리가 아주 잘 어울린다 잠에 들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해 침대에서 내려와 거실로 걸어 나오던 도중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다 

 

처음 들어보는 생소한 소리에 문을 열었다 

아주 밝은 빛이 문 사이로 빠져나왔다 

 

소매를 단단히 여미고 급하게 베일을 썼다 

문을 활짝 열자 비바람이 불며 한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아주 약하지만 밝은 빛이었다 저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이 어두운 집에 무슨 일로 찾아온 거지 라고 생각할 때쯤 그 사람이 먼저 입을 열었다 

 

하룻밤만 보내게 해달라고 

 

여자인가 본데 빛이 너무 밝았다 등이라도 들고 있는 건지 

비바람이 점점 거세지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들여보냈다

 

망토를 벗고 있는 사람에게 욕실을 안내해주고 넉넉한 옷을 가져다 두었다 

위에 내 침대에 안내를 해준 뒤로 나는 소파에 앉아 밤을 보냈다 

 

 

다음날 아침 맛있는 냄새가 코 끝을 스쳤다 

밥이라도 하고 있는지 주방에서는 밝은 빛이 빛났다 

쓰지도 않았던 전구가 기분 좋은 듯 한껏 빛을 내뱉고 있었다 

 

아직 베일이 얼굴 위에 남아있음을 감사하며 끌어모아 얼굴을 덮었다 

대충 괴물같이 생겼다고 한다면 보려고 하지는 않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주방으로 들어갔다 

 

주방에 들어가자마자 밝은 빛이 나를 맞이했다 

뜨거웠다 커다란 불덩어리가 나를 삼키는 것처럼 목이 아프고 눈도 아팠다 

 

베일이 자꾸만 머리에서 흘러내리려고 했다 

겨우 조금 보일 만큼에 어두운 베일도 이 빛에서는 제 효과를 내지 못했다 

 

베일을 꾹 잡고 겨우 앞을 바라보자 긴 은발이 흔들렸다 

처음 들어보는 다정한 목소리가 안녕하세요? 라며 인사를 건넸다 

 

감사 인사가 들려왔지만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아 고개만 끄덕였다 

 

온몸이 타는 것같이 고통스러워서 결국 고개를 숙이고 주방을 빠져나왔다 

내 방에 들어가서야 베일을 벗어던지고 숨을 내뱉을 수 있었다 

빛에 닿았던 부분이 화끈거렸다 

 

떨리는 손으로 몸을 진정시켰다 어질어질한 머리를 부여잡고 

숨을 들이쉬며 스스로를 안심시켰다

침대에서 숨을 들이쉬고 있을 때 노크 소리와 동시에 그 사람이 들어왔다 

급하게 주변에 이불을 끌어모아 얼굴을 가렸다

 

 

그렇게 이불을 끌어모아 얼굴을 가리고 있는데 차가운 손이 얼굴에 닿고는 이불을 끌어냈다 

 

"얼굴이 흉측해도 괜찮아요"

 

다정한 목소리가 들리며 아주 약한 빛이 보였다 

차가운 손이 내 얼굴을 살짝 어루만지더니 사라졌다 

 

작게 웃는 얼굴이 빛 사이로 살짝 보였다 

촛불도 무엇도 없었을 텐데 그 사람은 빛을 내고 있었다 

 

밝은 사람... 너무나도 밝았다 

그 빛에 현혹될 것만 같았다 

저렇게 눈 부신 빛이라면 나는 녹아내려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대는... 너무나도 빛나는 사람이다 

눈가가 아팠다 

 

나는 그대에게 괜찮다고 말을 해야 했다 

올라가지도 않는 한 번도 웃어본 적 없는 얼굴을 움직였다 

그 사람처럼 다정하게... 생각보다 잘 못 웃은 것 같다 

그 사람이 가만히 바라보다가 활짝 웃었으니까 

 

밖은 아직도 폭풍 이치고 시끄러웠다 

괜찮다면 여기서 머물러달라고 말을 했다 

내가 조심하면 되는 거니까 빛 정도야 버틸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항상 어둡던 집은 그 사람만으로 밝아지고 다정해졌다 

먼지가 있던 집은 깨끗해지고 

밝아졌다 

덕분에 집에서도 베일을 벗을 수는 없었지만 

그 사람에게 나오는 약한 빛을 버틸 수 있다는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며칠 있었을까 

 

갑자기 내 이름을 물어봤다 

자신의 이름은 아이리스라며 말을 해주며 나에게 물어왔다 

아이리스라면 집 근처에 있던 꽃들을 말하는 건가 

예쁜 이름이라고 말하며 내 이름을 말했다 

아니 이게 내 이름인지는 모르겠다 그저 빛이 있던 곳에서 우연히 들었던 좋아하는 말을 이름으로 삼았을 뿐이니까

실제로 불러주는 사람도 없고

나만 입안에 담아 굴렸던 이름이었으니까 

 

그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불러왔다 

내 이름을 누군가가 불렀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항상 어두운 곳에서 있어야 하는 것도 

빛을 바라보는 것도 전혀 할 수 없었던 나에게 그건 충분한 보상이었다 

몇 년을 한 없이 끝없는 세월을 의미 없이 보냈다 

빛도 없는 이 공간에서 한정된 삶을 살았다 

먹지도 않아도 괜찮고 자지 않아도 괜찮았다 

피곤하지도 배고프지도 않았으니까 

 

그러나 무언가 부족한 느낌을 채우기 위해 먹고 마시고 잠에 들었다 

채워지지 않는 것을 괴로워하며

그런데 무언가 만족한다는 게 느껴졌다 

사람 한 명만 있어도 괜찮다는 걸 느꼈다 

 

내 몸이 녹아내려도 괜찮다고 

 

무엇을 위해서 빛을 두려워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아프니까 두려워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그저 빛을 바라보면 그것을 사랑하게 될까 봐 그게 너무 무서웠던 것 같다 

 

우리는 이곳에서 함께 지냈다 

비와 바람은 이미 멈췄음에도 그녀는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무슨 생각으로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나에게 밖을 알려주었다 

내가 보지 못 한 것들을 

그것들을 그리워하게 만들고 보고 싶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네 그녀가 없는 세월은 상상도 못 하게 되었다 

잠을 자기 전에 서로에게 인사를 보내고 

같이 책을 읽고

밥을 먹고 

간단한 이야기를 했다 

내 머리카락을 묶어주고 빗어주며 자신의 이야기를 늘여놓는 걸 듣는걸 나는 좋아했다 

한 번도 서로 손을 잡아본 적도 

다정하게 말을 한 것도 별로 없었지만 

조금에 말로 서로를 바라보며 지냈다 

 

나는

그녀의 얼굴은 알지만 그녀는 내 얼굴을 보지 못했다 

항상 내 베일을 만지작 거리며 얼굴이 궁금하다고 말을 했다 

참아달라고 항상 말을 했다 

몇 년을 참았을까 

얼마 지나지 않아 빛이 그리워진다고 말을 했었다 

이 어두운 커튼을 걷어도 괜찮냐고 

그렇게 한다면 나는 녹아내릴 테지만 내 모습을 보고 싶다고 계속 말해온 그녀에게 

나는 더 이상 싫다는 말을 할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기다려달라고 말할 자신도

이내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커튼을 젖히는 그녀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바람이 들어와 내 베일을 날렸다 

장갑을 벗고 천천히 다가가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온몸이 아픈 걸 알았다 그리고 곧 부서져 내릴 것이라는 것도 

나는 사라질 것도 알았다 

 

천천히 그녀에 이마에 입을 맞추고 말을 했다 

빛을 받으면 나는 녹아내린다고 

그녀가 매우 당황한 듯 보였다 

내 몸에 힘이 빠지는 걸 느끼고 부서지는 걸 느꼈다 마지막으로 그녀를 끌어안고 천천히 말을 했다.

 

"고마웠어 아이리스"

 

온몸이 부서져 내렸다 그리고 그 자리에 남은 건 내 머리카락에 묶어줬던 그녀의 리본과 내 목걸이 그것뿐이었다.